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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4화

강형민 2023. 5. 10. 01:53

14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두통도 점점 사라졌다.

만날 때마다 남자를 주웠던 날 이야기를 하는 효진의 말에도 점점 둔감해졌다.

급기야 효진은 인아가 그를 데리고 있었던 게 거짓말이었나 의심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인아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대하고 집에 있는 오빠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더 회복이 빨라진 것도 있었다.

정인은 복학하기 전에 자격증을 왕창 따놓겠다며 학원을 등록했다. 남자들은 군대 갔다오면 변한다더니 주정인도 그런 듯했다. 군대 가기 전엔 그저 한량이더니.

새학기가 시작되며 인아는 좀더 바빠졌다. 학점을 꽉꽉 채워 수강신청을 한 데다가 이제 본격적인 취업준비 모드로 들어갔기 때문에.

자소서 준비와 영어 면접 스터디를 준비하며 하루를 25시간처럼 사는 그녀에게 효정을 비롯한 친구들은 독한ㄴ이라고 농담같은 진담을 던졌다.

"오늘 개강파티 갈거지?"

하의실종 패션으로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효진이 묻자, 인아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녁 때 과외 있어."

"주인아. 너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니?"

"인생이 꼭 재미있어야 해?"

"전에도 재미랑은 상관없이 사는 것 같긴 했는데, 최근에 더 심해진 것 같아.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야, 그 이야기 할 거면 하지 마라. 어차피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도 안 나는 거, 네가 옆에서 자꾸 강조하면 머리만 아파."

"병원에서 정말 아무 이상 없대지? 뭐, 뇌종양이나 이런 거 아니래지?"

재수 없는 소리를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생각하면서도 인아는 역시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래."

"근데, 어쩜 그렇게 기억이 홀라당 날아가냐? 그 남자가 너한테 뭐 약 먹인거 아냐?"

"영화 찍냐?"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렇지."

"그만 하고 다음 수업 교양체육……"

말을 하다 말고 인아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효진이 그녀를 보며 같이 멈춰서자 인아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이 소리는 이제 학교에서도 들려?"

"왜? 무슨 소리?"

"자꾸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 병원에서 귀에 아무 이상 없다고 했는데, 왜 자꾸 이런 소리가……"

"어? 나도 들리는데?"

효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하는 말에, 인아가 귀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뭐?"

"나도 첨벙 소리 들린다고. 어디서 들리는 거지? 아아…… 여기 체육관 지하에 수영장 있잖아. 거기서 나는 소리네."

"아……"

인아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체육관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효진이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너 무슨 노이로제 같은 거 생겼나보다."

그러나 인아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어, 야, 어디가! 우리 교양체육, 수영 아니고 테니스야! 거기로 가는 거 아냐!"

뒤에서 효진이 소리쳤으나, 인아는 정신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지하 1층 관람석으로 들어가니 수영장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습기가 확 느껴졌다. 곧 첨벙소리와 함께 구경하는 여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야. 여기 아니라니까?"

효진이 숨을 할딱이며 인아의 어깨를 턱 잡았으나, 인아의 시선은 아래층 수영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효진이 다른 여학생들과 똑같이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헐…… 저 남자, 뭐야……"

수영장 한 가운데 위치한 레인에 수영모자를 손에 든 검은 머리를 한 이국적인 남자가 보였다.

"학생! 수영모자 써!"

체육과 교수가 그를 보고 외치자 그가 서투른 한국어로 말했다.

"담담해요!"

"응? 담담해? 아, 답답하다고? 그래도 써야 돼. 다같이 쓰는 수영장이잖아."

"그만 할래요!"

그가 갑자기 물속으로 쑥 들어가더니, 한 마리의 인어처럼 물속에서 차렷자세로 다리만 요리조리 움직여 수영을 해 물 밖으로 나왔다.

그가 물 밖으로 나오자 인아 옆에 있던 효진을 비롯해, 관람석에 앉아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새하얀 피부에 긴 팔다리, 벌어진 어깨, 늘씬한 몸매에 촘촘히 배어 있는 근육. 정말 신이 두 번 빚으라고 해도 못 빚을 것 같은 완벽한 몸이었다.

"이야, 외국인이라 그런지 정말 한국인이랑 몸매 자체가 다르구나."

"저런 몸 만들려고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뭐, 어디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다는 거 같던데?"

"국가대표가 왜 한국에 있는 대학에 들어왔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효진 역시 인아를 보며 속삭였다.

"저 남자 진짜 대박이다. 주인아. 너 아니었으면 좋은 구경 놓칠 뻔 했다, 어?"

그런데 갑자기 여학생들 사이에서 꺄악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가 마치 아이돌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인아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커다랗고 진한 회색 눈동자. 처음 보는 남잔데도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체육과 교수가 위에 관람석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어이! 거기 학생들! 교양체육 학생들이지? 몇 반이야?"

그러자 여학생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b반이요!"

교수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그 흑발 남자에게 자기들을 어필하기 위해 내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b반 선생님 어디 가셨어?"

"오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수영장 구경하랬어요!"

참새처럼 짹짹대는 여학생들을 보던 중 효정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 인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야! 우리 수업 늦었어! 어떡해!"

효정에게 끌려가면서도 인아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 잘생긴 외모이긴 하나, 단순히 그래서가 아니었다.

저 남자, 틀림없이 어디선가 봤다. 외국인인데, 대체 어디서 본 거지?


수업분위기를 망친다고 책망하는 교수를 뒤에 두고, 남자는 늘씬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주인아.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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