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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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5화
강형민
2023. 5. 12. 19:26
15화.
오후 5시,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아의 전화벨이 우웅 울렸다. 과외 학생의 어머니 번호인 걸 확인하고 인아는 이보다 더 상냥할 수 없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제 수업 끝나서 가려고 하는데."
ㅡ 선생님, 어떡하죠? 우리 예솔이가 아직 학교에서 안 왔어요. 무슨 동아리 알림제 준비를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과외를 좀 늦췄으면 하는데, 선생님 시간 괜찮으신가 해서요.
이렇게 임박해서 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는 탓에, 인아는 동요하지 않고 친절한 자세를 유지해다.
"네. 그럼 예솔이가 언제 시간이 될까요?"
ㅡ 선생님은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그래도 예솔이의 엄마는 매너가 좋은 편이었다. 시간을 옮길 때 과외 선생의 스케줄부터 물어봐 주니까.
어떤 학생들의 엄마는 마치 종 부리듯 네가 우리 애 시간에 맞추라고 무언의 압박을 할 때가 많았다.
그동안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아니다 싶어도 수업을 유지했었는데, 거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는 그런 부담이 덜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장을 가지고 은행을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틀림없는 주인아의 통장이란다.
다만 돈을 넣은 은행이 동네 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이라고 했다.
아빠가 새엄마 몰래 모은 돈을 보내온 건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오빠가 알게 되면 낭패니까.
일단 잘 가지고 있다가 여차하면 뽑아서 다른 통장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과외 시간이 바뀌어 갑자기 시간이 뜬 인아는 개강 파티를 가볼까 하고 단톡방에 들어가 보았다.
대화 내용을 보아하니 벌써 가서 진을 치고 있는 동기들도 꽤 있는 듯했다.
여길 가면 친하지도 않은 애들과 친한 척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상이 털리고. 신상이 털리면 그걸로 또 친한 척을 해야 하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언덕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쭉 가면 체육관인데.
인아는 체육관을 가려던 게 아니라 후문으로 가려던 거다 자신의 발걸음에 타당성을 부여해 가며 열심히 언덕을 올랐다.
그러나 언덕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공연이나 행사를 위한 야외 광장 스탠드 앞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Hey!”
당연히 자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올라가려는 그녀를 더 큰 소리가 잡았다.
"야!"
"어?"
얼떨결에 뒤를 돌아본 인아의 눈에 아까 낮에 수영장에서 봤던 이국적인 남자가 의자 겸용인 돌계단 위에 걸터앉아 싱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새까만 머리와 대조되어 흰 얼굴이 유독 희어 보였다. 게다가 입술엔 뭘 바른 건지 윤기가 촉촉한 게 아이돌을 실제로 보면 저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덕후들 이야기고. 인아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괜스레 반발심이 들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알아요?"
"어?"
그의 가지런한 눈이 커졌다. 마치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긴 속눈썹이 잠시 동공을 덮는가 싶더니 절대로 아시아인은 아닌 게 분명한 회색 눈동자가 반달로 휘었다.
"아까 봤잖아."
또박또박 말하고 있지만, 역시나 발음이 특이하긴 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고 이런 식으로 행동해도 당연한 건 아니라, 그녀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반말하는 거예요?"
"...... 뭐,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나보다 나이 많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키가 큰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니 더 컸다.
"그쪽은 몇살인데요?"
인아가 고개를 빳빳이 들며 묻자, 해를 등져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뜨는 게 보였다.
"여기 나이로 하면…… 23살 정도?"
23살이면 확실히 인아보다 많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초면에 반말은 아니지 않나? 아니면 존대 표현을 모르나?
"......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인아의 질문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
"어디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가 천천히 발음했다.
"키프러스. 모르면 말아. 몰라도 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어쩐지 그 말이 자존심이 상해 인아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참 키프러스라고 검색창에 치는데 묵직한 게 어깨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그가 그녀 어깨에 상체를 기대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뭐해요!"
인아가 시뻘게진 얼굴로 그를 뿌리치자, 그가 항복 자세처럼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 나오나 봤어."
그의 표정은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는 표정이었지만, 인아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외쳤다.
"왜 남의 휴대폰을 보는데요!"
"그럼, 너도 내 거 봐."
그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자기 휴대폰을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인아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는 한국 사람과 아예 사고 체계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내가 그쪽 휴대폰을 왜 봐요?"
"내 이름 궁금해?"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인아가 똥 씹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안 궁금한데요?"
"그래?"
그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게 무슨 스무고개 놀이인지. 인아가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라티아나>
"뭐?"
낯선 말소리에, 아니 말소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소리에 인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 이름은 태은. 라 태은이야."
"라 씨가 있어요?"
"있더라."
"아까 말한 건 뭐예요?"
"뭐?"
"라티…… 뭐라고 했잖아."
"들렸어?"
"그쪽이 말한 거 아녜요? 당연히 들리지."
"그건 내 본명. "
"둘 다 여자 이름이네."
"수컷이야."
그의 말에 인아는 그가 한국어를 다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데 그가 다시 한 발짝 다가오며 물었다.
"너도 이름 말해야지."
"나, 나는 주인아."
얼떨결에 이름을 말하자 그가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겁해 손을 잡아 빼려는데, 그의 회색 동공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반가워, 주인아.>
또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인아가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칠 생각도 못 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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