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16화 본문
습작
16화
강형민
2023. 5. 15. 11:25
16.
자신의 저벅저벅 소리와 뒤에서 따라오는 저벅저벅 소리가 맞았다 어긋났다를 반복했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 인아의 뒤를 태은이 서너 발짝 떨어진 뒤에서 졸졸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아, 왜 따라오는데요?”
마침내 인아가 못 참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커다래진 눈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에 인아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왜요? 뭐?”
“너, 조용히 해야 돼. 사람들이 쳐다 봐.”
“허어……”
마치 그녀가 이상한 사람이기라도 한 양 주변 눈치를 봐 가며 말하는 그를 향해 인아가 한숨을 뱉어냈다. 외국애들은 다들 이렇게 뻔뻔한가?
“왜 따라오는데요?”
“너 어디 가는데?”
“스토커예요? 내가 어딜 가면요?”
“스토커가 뭐야?”
“여자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을 스토커라고 하잖아요.”
그러자 태은의 시선이 잠시 모로 향했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아아, stalker?”
감작스러운 버터 발음에 인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망신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마디를 더했다.
“여기 와서 제일 이상한 게 영어 엄청 많이 쓰는데, 막상 영어로 물어보면 사람들이 말을 안 해. 왜그래?”
그게 공교육의 폐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고차원적인 대답을 그가 알아들을리 없었다.
인아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빤히 보자 그가 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등을 쭉 펴며 말했다.
“배고프다. 생선 먹으러 가자.”
갑자기 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도 이상한데 구체적인 메뉴 선정도 이상했다. 웬 생선.
“나 알바 가야 하거든요?”
“알바?”
“아, 아르바이트요.”
인아가 최대한 혀를 굴려보려고 애쓰며 말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바 알아. 텔레비전에 알바천* 맨날 광고하잖아.”
아니, 알바는 알면서 스토커는 모른다고?
인아가 샐쭉해져서 몸을 홱 돌렸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밥 먹자. 배고파.”
아니 이게 무슨……! 처음 보는 여자한테 밥을 먹자고 권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조르는 남자가 어디 있나 싶었다. 머리로는 냉정하게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은 휴대폰을 검색하고 있었다.
“꼭 생선이어야 해요?”
자기가 왜 지금 이걸 묻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다. 오빠도 이렇게 조르는 스타일은 아닌데, 왜 익숙한 거지?
“어. 생선.”
“하아. 그럼 생선이 나오는...... 아, 씨, 내가 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인아가 대놓고 짜증을 냈지만,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꼿꼿하게 서서 그녀가 휴대폰을 검색하는 걸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 휴대폰 소리임을 깨달았는지 어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Γειά σου”
역시나 낯선 말이었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싶어서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그가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이국적인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 걸 보며, 인아는 좀 이상해서 그렇지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구나 생각했다.
유럽에서 왔다고 했던가? 프로스튼가…… 그 나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대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전화를 끊은 그가 갑자기 웃는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빨리 가자. 나 잡으러 온대.”
갑작스러운 말에 인아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응? 누가요?”
“있어. 하여간 빨리 가자. 가다 보면 식당 나오겠지.”
그가 이번엔 인아의 손을 잡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인아는 마음 속으로는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끌려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너무나 따뜻했던 것이다. 게다가, 감촉 또한 몹시도 익숙했다.
그가 생선 먹는 모습을 인아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어찌나 신기하게 먹는지 음식을 나르던 주인도 멈춰서서 그의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가시를 발리고 말고 하는 게 없었다. 굴비를 머리부터 덥석 물더니 오드득 오드득 씹어 먹는 게 아닌가.
“아, 아니, 생선 가시 목에 안 걸려요?”
“어.”
그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생선 가시가 되게 단단하지 않나? 그걸 그렇게……”
인아가 생선 살을 한 입 정도 먹었을 때 그는 이미 생선 한 마리를 끝장내고 있었다.
생선 한 마리를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다 먹은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더 주세요!”
“어어? 또 시켜요?”
“겨우 한 마리 먹었어.”
“아니, 밥이랑 반찬 먹으면 되잖아요.”
“너 먹어.”
주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생선을 갖다주자 그가 다시 생선머리를 덥석 물었다.
“흐어……”
인아가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태어나서 이런 사람은 처음인데, 처음이 분명한데,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쩐 일인지 몰랐다.
“그쪽 나라에서는 생선을 그렇게 먹어요?”
“어.”
“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생선을 머리부터 먹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 부모님이 음식물 쓰레기 남기는 걸 싫어하셨나보죠?”
애써 표정 관리하며 묻는 말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먹는 거에만 집중했다.
순식간에 생선 열 마리를 해치운 그가 긴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갔다. 저렇게나 많이 먹는데 어떻게 저렇게 날씬한가 신기해하며 인아는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서둘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알바는 어디서 해?”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온 그가 물었다.
“과외 해주는 거라 학생 집으로 가면 돼요.”
“과외? 거기가 어딘데?”
“학생 가르치는 알바를 과외라고 해요.”
“학생 집이 어디냐고."
“어딘지 말하면 알아요?”
"일단 말해봐."
남의 집을 왜 묻나 해서 인아가 눈을 흘기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그래? 그럼 가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다시 잡자, 인아는 이번엔 이성을 갖고 손을 잡아 뺐다.
"왜?"
무심한 질문에 인아가 벌게진 얼굴로 서둘러 대답했다.
"왜, 왜긴 왜에요? 자꾸 손을 잡으니까......"
"손 잡는 거 싫어? 그래. 그럼 그냥 가."
"그냥 어딜 가요?"
"지하철 탄다며. 지하철 타러 가."
처음 만난 남자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는 처음 나누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밥을 먹고, 손을 잡고, 같이 걸을 수 있는지 인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의 황당한 요구들을 계속 들어주고 있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익숙함 때문일까. 처음 보는 남자가 분명한데 왜 익숙한 건지.
뒤늦게 이성을 차린 인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그쪽은 그쪽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가요. 밥 잘 먹었어요."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럼 좋아할 줄 알았나?
“우리, 오늘 처음 봤거든요? 처음 본 사람이 이렇게 들이대면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어요. 네?”
“내가 낯설어?”
“에?”
혹시라도 그녀가 그를 익숙하게 생각하는 걸 그가 눈치챘나 싶어 인아가 오버해서 대꾸했다.
“오늘 처음 봤는데, 당연히 낯설죠!”
“그래. 알았어. 잘가.”
그가 쿨하게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그가 물러서면 좋아해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데, 너무 순수하게 물러나니 할말이 없어졌다.
잠시 그를 보던 인아는 몸을 홱 돌려 지하철역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이랑 계속 같이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라티아나가 짧은 다리로 참 부지런히 잘도 걷는다 생각하며 인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옆에 와서 섰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라티아나처럼 키가 큰 여자였다. 그녀가 그리스어로 짧게 말했다.
[말씀을 하고 가시라니까요.]
[찾았잖아.]
[...... 저 여자입니까?]
[어. ]
[유럽 여자들이 더 예쁜 것 같은데요?]
[정신차리고 잘 봐.]
냉랭한 말에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뮤에는 언제 갈거야? 나 데려다주고 간다며?]
[라티아나님 적응하시는 거 보고 가려고요.]
[적응은 무슨. 가.]
외국인같아 보이는 두 사람이 길 한복판에서 대화를 나누고 서 있는 걸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너무 눈에 띠십니다. 오늘 학교에서도 그렇고, 저 여자한테 접근하시는 것도 그렇고.]
표정은 무표정인데 어투는 걱정스러운 그녀를 보며 라티아나가 피식 웃었다.
[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자기가 들이대서가 아니라 외모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주군을 보며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비위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아직도 예전 그집에 사나?]
라티아나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그녀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너무 좁아서 불편하셨다면서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결혼도 하기 전에 남녀가 동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불법도 아니잖아.]
주군의 말에 정말 동거라도 할 생각인가 싶어 그녀가 서둘러 말했다.
[육지인간이랑은 안 됩니다. 아시죠?]
[또 나같은 변종이 나올까 봐?]
그녀를 힐끗 쳐다보는 그의 회색눈이 반짝 빛을 뿜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럴 생각 없어. 그냥…… 귀엽잖아.]
다시 인아가 걸어간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라티아나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떴다.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화 (2) |
2023.05.24 |
17화 (14) |
2023.05.19 |
15화 (4) |
2023.05.12 |
14화 (6) |
2023.05.10 |
13화 (18) |
2023.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