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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8화

강형민 2023. 5. 24. 21:50

18화

 

그의 말에 잠시 넋이 나갔던 인아는 곧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 교양 수업 바로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해요. 혼자 밥 먹든지 아니면…… 기다리든지 마음대로 해요.”

 

몸을 홱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인아 뒤를 라티아나도 부지런히 따라 내려갔다. 놓치면 강의실마다 죄다 또 찾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불편을 또 감수할 수는 없었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강의실에는 빈 강의실을 찾아 공부하러 들어온 학생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갈 줄 알았던 그도 느긋한 자세로 인아 옆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교수가 들어오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무리 사이에서도 단연 튀는 외모의 라티아나를 다들 안 보는 척하며 힐끔힐끔 보는 게 보이는데, 그는 의외로 자기 수업도 아니면서 교수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를 신경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인아는 수업에 집중했다. 오전 수업 하나 마쳤을 뿐인데, 몹시도 피곤했다. 

 

 

“아, 수업 ㅈ나 길어.”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며 라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이국적인 얼굴에서 참 한국인다운 욕이 나오니 이질감이 들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다들 쓰던데?”

 

“그거 욕이예요.”

 

“욕? 다들 표준어처럼 쓰던데.”

 

“...... 표준어 아니니까 쓰지 마요.”

 

왠지 부끄러워진 인아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라티아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너, 내가 찾아본다. 표준언지 아닌지.”

 

“나 참, 내가 한국 사람이거든요? 밥 먹으러 가요. 어제 갔던 그 생선 집 가면 돼요?”

 

“그 전에……”

 

그가 티셔츠 목을 잡아 늘이며 말했다. 

 

“물에 좀 들어갔다가 가자.”

 

“네?”

 

뜬금없는 말에 인아가 무슨 말인가 해서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아까보다 얼굴도 창백하고 입술도 마른 게 몹시 피곤해 보였다.

 

“어디 아파요?”

 

“그건 아니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가자.”

 

그가 갑자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끌기 시작했다. 언덕을 한참 올라야 있는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이제는 푸르스름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 씨, 옷 못갈아 입겠는데?]

 

그가 그리스어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인아가 할딱거리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긴 보폭을 따라서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다. 

 

체육관 지하 수영장에는 다들 수영 연습이 한창인 듯했다. 교수가 지하 1층 관람석에 서 있는 라티아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너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나?”

 

그런데 소리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교수 뿐만이 아니었다. 인아는 물론이요, 수영장에 있던 학생들까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라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던지더니 난간에서 그대로 지하 2층 수영장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저, 저 미친 놈이!”

 

교수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영장 물 속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점프에 멋진 다이빙이었다. 수영 룰에 대해 잘 모르는 인아가 보기에도 금메달 감이다 싶을 정도로.

 

교수는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맑은 수영장 아래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그를 바라보았다. 바지는 언제 벗어젖힌 건지 맑은 물속으로 비치는 그는 팬티만 입은 채였다. 

 

물에 젖어서 벗기도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다 생각하며, 인아는 물속으로 훤히 보이는 조각같은 몸을 열심히 구경했다.  

 

마치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처럼 한참을 물속에 있던 그가 곧 개운한 표정으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교수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라태은 군! 수업 시간 끝날 때 이렇게 나타나면 어떡해! 12시부터 훈련인 거 몰랐나!”

 

그러자 라티아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경기 안 나가니까 수업 아닌 훈련 안 합니다.”

 

“그러니까 왜 안 나가? 외국인도 나갈 수 있다니까?”

 

교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까 호통칠 때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게 어딘지 사정하는 어투였다. 

 

“안, 공평합니다.”

 

“응? 안 공평? 아아, 불공평하다고?”

 

교수의 말에 라티아나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불이 붙지? 반대말은 안이 붙는데?”

 

라티아나의 말에 수영장에 있던 학생들이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공평 앞에는 안이 아니라 불이야, 불! 아,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경기에 왜 참여 안 하는데? 자네는 충분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텐데!”

 

약간 정신이 없어보이는 교수의 말에 인아는 교수님도 저 남자에게 말리는구나 싶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영혼이 털리면서 어느덧 그의 말에 반주를 맞추게 된다.  

 

라티아나는 교수의 말에 한 마디도 안 지며 말했다. 

 

“그럼, 나는 너무 잘해서 불공평합니다.”

 

주변에 있는 학생들의 표정이 다 재수없어 하는 표정이 분명한데, 라티아나는 그렇지 않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한참 실랑이가 오가다가 마침내 수업이 끝났는지 다들 인사를 하고 수영장에서 나와 샤워실로 향했다. 라티아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물속을 요리조리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바지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뒤 물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물을 흠뻑 빨아들인 청바지가 들려 있었으니까. 

 

옷을 들고 물 밖으로 나온 그가 인아를 향해 기다리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때 샤워를 마친 학생들 몇 명이 계단을 올라가며 나누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저 녀석은 사람이 아니야. 물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오래 숨을 참지?”

 

“핀란든가 하와인가 뭐 어디서 수영 선수였다는 말 있던데, 진짠가? 아까 다이빙도 대박이지 않았냐?”

 

“관종이야, 관종. 굳이 2층에서 뛰어들 게 뭐야? 여자 친구 보여주려고 그런 건가?”

 

의자에 앉아 있는 인아가 안 보이는 건지,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건지, 한참을 저들끼지 떠들던 학생들이 사라지자 인아는 아무도 없는 맑은 수영장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가 물 속으로 뛰어들 때,  인아가 보기에는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빨리 물 속에 들어가야 할 것처럼 다급해 보였다. 마치 죽을 것 같은 위기감까지 느껴졌다. 왜지?

 

그때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라티아나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앞머리가 죄다 내려와 있어서 그런지 이국적인 얼굴이 아이처럼 어려보였다. 

 

“본인 옷 맞아요?”

 

그는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팔다리가 깡충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한 얼굴로 강아지처럼 머리를 털며 말했다.  

 

"몰라."                                                                                                                                                                                                                                                                                                                     

“작아 보이는데?”

 

“팔다리가 길어서 그래. ”

 

“아깐 왜 그랬어요?”

 

인아가 말간 눈으로 그에게 묻자, 라티아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아니, 급하게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길래. 물에 안 들어가면 무슨 일 나나 싶어서요.”

 

그러자 그가 잠시 그녀를 보다가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 

 

“더워서 건조해서 그랬어. 건조하면 숨쉬기 힘들어.”

 

"병이예요?"

 

피부가 건조하다고 숨쉬는 것까지 힘들 정도면 질병이 틀림없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너네들이 보기에는.”

 

자꾸 너네들, 너네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이상했지만, 인아는 다시 물었다. 

 

“유전병 같은 거예요?”

 

“유전이 뭐지?”

 

“네? 음……  heredity?”

 

인아가 약간 주저하며 수능 영어를 말하자, 그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그 표정이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라티아나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아, my blood? 비슷해.”

 

그런 유전병이 있나 해서 생각에 잠기는 인아를 보며 그가 한결 상쾌해진 얼굴로 말했다. 

 

“가자. 물고기 먹으러.”

 

‘물고기’라는 단어에 인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물고기 먹자.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생선이라고 제대로 말하더니 웬 물고기? 상당히 이상한 표현인데, 왜 익숙하지?

 

인아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라티아나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왜?”

 

“태은 씨, 전에 나, 만난 적 있어요?”

 

그러자 그의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진해지는 게 보였다. 그 눈빛을 보며 인아가 다시 물었다. 

 

“나, 만난 적 있어요?”

 

“...... 왜?”

 

“아니, 태은 씨 처음 보는데, 틀림없이 처음 보는데, 태은 씨가 하는 말이 낯설지가 않아서요. 아니, 태은 씨 자체가 어딘가 익숙해. 내가 전에도 외국인을 만난 적이 있었나?”

 

“...... 그럴지도.”

 

“근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나 예전에 기억 살짝 잃어버렸을 때 있거든요."

 

인아의 말에 그는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차분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 보며 인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어떤 사람을 돌봐줬다는데 나는 기억이 전혀 안 나요.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고 있는데 너무 신경쓰여. 근데, 나 왜 이 말, 그쪽한테 왜 하고 있냐...... 나 참."

 

뒤늦게 이성을 차리고 인아가 헛웃음을 흘리자 그도 피식 웃어 보였다. 

 

"너한테 그 말 한 사람은 누군데?"

 

"친구요. 친구랑 내가 어떤 사람을 구해줬대. 그런데 나는 기억이 안 나요."

 

"친구 누구?"

 

기억을 잃었다는 것보다 친구에게 더 관심을 두는 그가 이상해 인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라티아나는 이내 관심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 가. 배고파." 




다음날 이틀이나 학교를 안 온 효진이 왠일로 1교시 교양 수업엘 다 들어왔다. 평소라면 자고 있을 시간이건만.

 

“주인아. 너, 체육과 그 외국인 학생이랑 사귄다며? 아니, 언제 그렇게 진도가 나간 거야?”

 

1교시 수업을 왜 필사적으로 들어왔는지 이유를 안 인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가 사귀어.”

 

“아니야? 야, 어제 하연이, 수영이 만났는데 걔들이 네 얘기 밖에 안 하더라. 어떻게 된 거야, 응? 언제 사귀었는데? 너, 그럼 그 때 네 남자 친구 보여주려고 나 체육관 데려간 거였어?”

 

효진이 수선스럽게 묻는 걸 들으며 인아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수업은 안 오고 애들은 만났냐?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우연히 만나서 밥 먹은 거야.”

 

“야, 강의실까지 찾아왔다면서 무슨 우연이야? 장혜림 교수님 완전 열받았다던데.”

 

“네가 수업 째서 더 열받으셨거든? 너는 전공 수업을 째냐.”

 

“지금 핵심이 그게 아니잖아. 너 어떻게 된 거냐고. 어?”

 

효진이 못 참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묻는 말에 인아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야야, 진정하고 교수님 들어오셨다.”

 

효진이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단상 앞에 선 교수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짓으로 이따 꼭 설명하라는 표시는 해보였다. 

 

인아는 그녀에게 솔직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직 친구라고 말할 단계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나한테 달라붙는 걸까. 

 

첫눈에 반했나? 

 

그러나 이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에 인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기가 그런 빼어난 미모도 아니고, 성격이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는 그저, 조금 이상한 또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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