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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9화

강형민 2023. 5. 26. 19:45

19화.

오전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온 인아는 저도 모르게 복도를 둘러보는 자기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누굴 찾고 있는 거야.

“주인아!”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던 효진이 잽싸게 밖으로 나와 인아를 잡았다.

“밥 같이 먹자.”

“네 친구들이랑 먹어야 하지 않아?”

“야, 다 같은 관데 내 친구가 네 친구지. 같이 밥 먹자고.”

인아가 뒤를 돌아보니 여자애 몇 명이 모여서 저들끼리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같은 과라고는 하나 4년 내내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다.

오는 친구 안 막고 가는 친구 안 말리는 인아는 효진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니 그녀와 친구가 되었던 것뿐이지, 저 친구들과도 일부러 관계성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타고난 E성향인 효진은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리는 걸로 에너지를 얻지만, I성향 인아는 인간관계가 감정 노동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과외 학생이나, 학부모처럼 공적인 만남이 더 편했다.

무심코 인아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본 수영장 물 만큼이나 새파란 하늘이었다.

라태은이라는 남자도 효진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효진과는 확실히 그 느낌이 다르다.

“주인아! 너 또 무슨 생각해?”

효진이 그녀 눈앞에 손을 휘저으며 묻자 인아가 효진을 보았다가 이내 그녀 뒤를 보고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왜?”

“대현 선배?”

인아의 말에 효진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새까만 남자가 자기보다 작은 남학생들을 내려다보며 시시덕대고 있었다.

“서대현 복학했나 보네?”

효진이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인아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잽싸게 자리를 피할 양으로 몸을 돌렸으나, 뒤에서 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주인아!”

인아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여전히 눈이 좋다, 저 인간은.

“주인아, 주인아!”

그가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게 그녀의 목소리를 부르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어? 최효진도 있었네?”

신입생 오티 때 다 같은 조이었기 때문에 서대현과 최효진, 주인아는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서대현도 최강 E고 최효진도 슈퍼 E인데, 이상하게 두 사람은 서로 잘 안 맞았다.

“대현 선배 제대한 줄 몰랐네요?”

효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대현도 싱긋 웃으며 마주 대꾸했다.

“나한테 관심 좀 가져주라. 남친한테만 관심 두지 말고.”

“남친한테 관심 쏟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선배한테까지.”

“그러면, 천상 남친 없는 우리 주인아에게 관심을 기대봐야 하나?”

그가 인아와 시선을 맞추며 웃어 보이자, 벌게진 얼굴로 그저 서 있는 인아 대신 효진이 말했다.

“주인아 남친 있거든요?”

“뭐? 야, 주인아. 너 그새 고무신 거꾸로 신은 거야?”

“뭐라는 거야. 둘이 사귀기라도 했어요?"

이번에도 인아 대신 효진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두 사람의 실랑이에 효진과 친한 과 친구들까지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와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면서, 인아는 의도치 않게 무리 사이에 끼게 되었다.

또다시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오려는데, 효진이 더 피곤한 제안을 해왔다.

"대현 선배 복학했으니까, 우리 같이 밥이나 먹자. 선배가 쏠 거죠?"

"야, 너는 불쌍한 복학생 사줄 생각은 안 하고 벌써부터 뜯어먹을 생각만 하냐? 뭐, 오랜만에 주인아도 봤으니, 내가 쏘지, 뭐. 주인아 뭐 좋아해?"

인아가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으나, 대현은 모르는 척 다정하게 물어왔다.

"인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대현의 손이 인아의 어깨에 막 올라오려 할 때, 갑자기 그녀의 몸이 뒤로 쑥 당겨지며 정수리 위로 맑은 저음이 들려왔다. 

"주인아, 나랑 먹을 거야."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딱 그쳤다.

인아가 자기 양팔을 잡고 있는 희고 커다란 손을 보았다가 고개를 비틀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긴 목과 날렵한 턱선에 오뚝한 코가 보이더니, 곧 신기한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 그때 수영장!"

효진이 무례하게 손가락을 번쩍 들어 외치자, 라티아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좀 전까지 서대현 주변에 몰렸던 시선이 이번엔 라티아나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남친 생겼어?"

서대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으나, 반대로 라티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인아를 보고 물었다. 

"남친이 뭐야?"

그러나 인아는 붉어진 얼굴로 자기 팔을 잡고 있는 라티아나의 손을 뿌리치고는 효진을 향해 말했다.

"나는 지금 밥 생각 없어. 너희들끼리 먹어. 선배도 나중에 봐요."

대현을 향해서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인아는 부지런히 비상구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인아!"

"인아야!"

대현과 효진이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으나, 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치듯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후다닥 따라오는 발소리도 들렸으나 인아는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주인아."

건물 현관을 벗어났을 때야 라티아나는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인아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르는 소리에 인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한 발짝 앞서 섰던 라티아나가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누가 내 남친이예요?"

인아의 뜬금없는 말에 라티아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인아는 그에게 화를 내면서도 이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남친이냐고 한 건 서대현인데, 왜 이 남자가 그런 말을 한 것처럼 화를 낸단 말인가.

그러나 라티아나는 억울해하기는 커녕,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남친이 뭔데?"

"...... 남자친구요."

인아가 풀이 죽어 대답하자 그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또 줄임말이야? 너네는 왜 그렇게 사전에도 없는 말을 막 줄여서 써?"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며 인아는 이 남자와 무슨 말을 하겠냐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수컷이 나보고 남자친구라고 해서 기분 안 좋아?"

그가 허리를 숙여 인아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인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기분을 왜 그쪽이 신경 쓰는데요?"

수컷이라는 표현이 웃겼으나, 인아는 그가 하는 질문의 의미가 더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주인아 기분, 신경쓰여."

"그러니까, 왜요?"

 

"...... 글쎄."

 

애매하지만 그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그도 의문이었다. 이 여자가 왜 신경쓰일까. 왜 기억은 지워놓고 이 여자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을까. 할 일도 미뤄두고. 

 

그의 진지한 눈빛에 인아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시선을 내리며 새침하게 물었다. 


"오늘은 또 왜 왔어요?"

"왜 자꾸 물어? 보고 싶어서 온다니까."

 

보고 싶다는 말이 어쩐지 설렜지만, 인아는 낯선 남지다, 게다가 외국인이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툭 던지듯 말했다. 


"1학년 때 좋아했던 선배예요."

뜬금없는 말인데 라티아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아까 그 수컷?"

"네."

"흠."

라티아나가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낮게 말했다. 

"너랑 안 어울려."

이게 웬 오지랖인가 싶어 인아가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왜요?"

"그 수컷은 상어야. 너는 흰동가리고."

"네? 흰동…… 뭐요?"

"흰동가리. Clown Fish."

이상한 말을 진지한 얼굴로 하는 그를 보며 인아는 흰동가리가 대체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분명히 어디서 들었는데.

"게네들, 서로 어울려, 안 어울려?"

"......?"

흰동가리가 뭔지 모르니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서 찾아보고 싶으나, 그러기도 귀찮았다.

"이제부터 나 좋아해."

그의 말에 인아의 눈이 커졌다. 

 

"네?"

 

뜬금없이 자기를 좋아하라는 말에 인아가 미처 뭐라고 대답을 못하는데 그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나 좋아하라고. 나는 음…… 블루탱이니까."

"...... 뭔 탱이요?"

"Blue tang”

넋 나간 표정으로 라티아나를 보던 인아의 눈이 점점 생기를 띠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니모! 니모를 찾아서! 맞죠?"

"응?"

이번엔 라티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니모에 나오는 물고기들이 흰동가리, 블루탱 이런 애들이잖아요. 아, 어디서 들어봤나 했네. 지금 만화 보고 말하는 거였어요?"

"...... 안 봤는데."

"그러고보니 태은 씨 블루탱이랑 좀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눈이 커다란 게. 그 친구 눈도 회색이었던 것 같은데."

"블루탱 눈은 새카맣거든? 알고 말해."

"물고기, 물고기 하더니 정말 물고기에 관심이 많나 봐요. 근데 생선은 그렇게 먹어요? 안 불쌍한가?"

 

"너네가 소, 돼지, 양 이런거에 관심 많으면서 잡아 먹는 거랑 똑같은 거야."

 

적절한 비유에 인아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리다가 곧 민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근데, 왜 그쪽 좋아하래요? 태은 씨, 나 좋아해요?"

"어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에 인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왜…… 왜요?"

나에 대해 뭘 알고?

"신기하잖아."

"뭐가 신기해요?"

"흰동가리는 원래 물에 있어야 하잖아. 근데 육지에 있으니 얼마나 신기해. 그러니까 좋아하지. 안 그래?"

그의 설명에 인아는 그가 좋아한다는 한국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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