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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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21화
강형민
2023. 5. 31. 16:40
21화.
이제 주인아의 과 동기들은 물론이요, 교수들까지 모두 라티아나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도 이국적이라 눈에 띠는데, 인아의 전공 강의실 앞에 항상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는 그에게 대놓고 ‘자네는 수업이 없나’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이 해맑은 젊은이는 당당하게 ‘주인아와 밥 먹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효진은 인아를 보며 늦바람이 무섭다고 남친이랑 하루도 밥을 안 먹으면 입안에 뭐가 나냐고 빈정거렸다.
주인아가 아무리 남친이 아니라고 해도 공공연한 라티아나의 행보에 그녀도 점점 해명하기를 포기했다.
"어디 아파요?"
인아가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해끄므레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
"아니? 왜?"
그가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젓가락질을 못 하니 당연하다는 듯 그는 늘 포크로 밥을 먹었는데, 그나마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잘 못 먹는 거 같아서요."
"잘 먹고 있어."
라티아나가 영혼 없이 말했다. 요 며칠 주인아와 먹는 음식들은 정말 끔찍하게 맛이 없었다.
모든 음식에서 괴이한 맛이 났다. 애니 말로는 마늘이란다. 가뜩이나 식감도 익숙치 않은데 그 맛과 향 때문에 라티아나는 음식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요즘 왜 생선 안 먹어요?"
인아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으니, 일부러 밖으로 나가 생선집을 안 찾아도 되서 편하긴 했지만, 저돌적으로 생선을 삼키던 그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 신경이 쓰였다.
"앞으로 너 좋아하는 거 먹으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인아가 눈을 둥그렇게 떠 그를 마주 보자 라티아나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 수컷처럼 네가 좋아하는 거 먹을 거라고."
"어떤 수컷을 말하는 거예요?"
인아가 그의 말을 따라하며 묻자, 라티아나가 수저를 딱 놓으며 말했다.
"네가 좋아한다는 그 수컷."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아가 팔을 쭉 뻗어 라티아나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요! 여기 학교 식당이거든요?"
"그르그르그(그럴 거라고)."
그가 웅얼거리자 인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얼른 손을 뗐다.
“아, 괜히 말했어.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하면 안 돼요, 네?”
“비밀이야?”
“뭐……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그럼, 그 수컷도 모르나?”
“왜 자꾸 수컷이라고 해요? 남자라고 해요, 아니면 선배라고 하든가.”
“...... 싫어.”
갑자기 그가 고집을 부렸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고집을 피우는 그를 보며 인아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요. 그리고 이젠 나,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해요.”
거짓말이었다. 복학한 걸 보자마자 가슴이 뛰어, 그가 하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 했다.
눈치빠른 효진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을 들킬까 해서 라티아나를 핑계삼아 얼른 자리를 피했는데,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눈치없고 모자라는 남자인 걸 알고 있었는데, 왜 굳이 말을 했을까. 선배 보고 너무 당황해서 미쳤나?
라티아나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고 자기 식판 위에 있는 파인애플 샐러드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놔주었다.
“왜요? 안 먹어요?”
인아가 놀라서 묻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 먹어. 텔레비젼에서 보니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다라구나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더군.”
“다라구나?”
인아가 그의 말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하자, 라티아나는 이 말이 아닌가 해서 비슷한 다른 말을 해보았다.
“다라구리?”
“다라구리? …… 아! 달달구리?”
“아, 달달구리.”
그의 말에 인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 어려운데, 그래도 잘 아네요, 라티나 씨.”
“어?”
그녀의 말에 라티아나의 동공이 커졌다. 눈동자 색이 연하다보니 동공이 커지는 게 확연히 보여 약간 무서웠다.
그러나 라티아나는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보더니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내 이름, 기억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식당에 있던 학생들이 죄다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어우, 뭐야?”
“삐이이이 소리 나지 않았어?”
“아, 머리 아파.”
“어디 누전 됐나?”
“방송실에서 내보낸 소리 아냐? 미친……”
라티아나는 물론이요, 인아도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티아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헛기침을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인아는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커다래진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이 사람 목소리 때문인가? 그런데……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인아가 자기 이름을 부른 덕분에, 아니 정확하게 부른 건 아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부르던 이름을 부른 탓에 저도 모르게 원래 목소리를 내버렸다.
그러나 통역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역시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럼 내 말도 알아들었을 텐데, 왜 아무 말이 없지? 처음 만났을 떄의 기억이 난 건가?
라티아나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동안 인아는 아까 식당에서의 상황을 다시 리마인드해보고 있었다. 그가 낯선 목소리를 내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그게 그렇게 듣기 힘든 소리였나? 삐이이이 소리라고 했는데. 나는 사람 말로 들렸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 걔들 귀가 다 잘못된 거 아니야? 사람이 기계 소리를 낼 수 있나?
“아까, 내 말 들었어?”
마침내 라티아나가 못 참고 먼저 입을 열자, 인아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사람들이 왜 그런 거예요?”
“어?”
“아니, 태은 씨가 외국어로 말하니까 다들 귀막았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다시 태은 씨로 호칭이 돌아온 걸 보며 라티아나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그냥 우리 말로 말했는데.”
“다시 해봐요.”
“뭐?”
“다시 해 보라고요.”
“...... 됐어. 아까 사람들 반응 못 봤어?”
“근데 나는 왜 괜찮았지?”
인아의 말에 라티아나의 얼굴에 다시 기대어린 표정이 떴다.
“넌, 괜찮았어? 그럼…… 내 말도 알아들었나?”
“내 이름 기억났냐고 물었잖아요. 맞죠?”
“어. 기억났어?”
“그때 말해줬잖아요. 라태은이라고.”
“아니, 그건 한국 이름이고 원래 이름. 네가 나 원래 이름 불렀잖아.”
어쩐지 그의 표정이 간절한 걸 보고 인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티나?”
“어. 그게 기억났어?”
“네. 전에 말해줬잖아요.”
“언제를 말하는 거지?”
그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한 발짝 다가오며 묻자 인아가 반대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에 체육관 앞에서 만났을 때 말해줬잖아요.”
“어?”
“그때도 오늘 한 말로 말해줬는데? 라티나라고.”
“아……”
혹시라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았다. 자기가 기억을 지우고는 상대방이 기억을 못한다고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라티아나는 스스로가 모자라게 느껴졌다.
“또 수업 있어요?”
“어.”
“몇 시에 끝나요?”
“5시.”
“흠……”
인아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라티아나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인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도서관에 있을게요. 끝나고 거기로 올래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라티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그가 그녀를 찾아 다녔지, 단 한 번도 그녀가 먼저 그에게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좋아하는 학식만 먹은 보람이 느껴졌다.
“오늘은 알바 없으니까 저녁 같이 먹어요. 생선 맛있는 곳 알아냈어.”
[그래?]
라티아나의 입에서 이번엔 키프러스에서 쓰던 그리스어가 튀어나오자, 인아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까 한 외국어는 알아들었는데 이번에 한 외국어는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주변에 걸어다니는 학생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의문점이 떠올랐지만, 그에게 뭐라고 물어봐야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저녁 때 만나자고 하는 이유만 심플하게 말했다.
“태은 씨가 계속 밥 샀잖아요. 학식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티아나가 박수를 짝, 짝 쳤다. 인아는 그게 그렇게 좋은가 해서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나 좋아하는 건가? 그 수컷 말고?”
“네?”
갑작스러운 말에 인아는 넋이 나가 말을 못 잇는데, 라티아나는 내리쬐는 해보다도 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잘 먹을게. 주인아.”
아니, 생선을 사주면 좋아하는 건가.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급발진을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있으면 서대현 생각이 1도 안 나는 게 사실이긴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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