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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22화

강형민 2023. 6. 2. 22:41

22화. 

 

라티아나와 있으면 서대현의 생각이 1도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 입구에서 서대현과 딱 마주쳤다. 

 

“주인아!”

 

그는 늘 그녀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댔다. 당장 몸을 돌려 나가고 싶은걸, 지금 그러면 너무 대놓고 피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인아는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러 온 거야? 수업은?”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어요.”

 

“남친이 맨날 전공 강의실 앞에 기다리고 서 있다며?”

 

대현이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인아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남친 아니거든요?”

 

인아의 말에 그가 의외라는 듯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남친도 아닌데, 그렇게 매일 와?”

 

“그냥 뭐, 밥 먹으러?”

 

“헐. 그럼, 너 좀 싫겠다?”

 

“네?”

 

“아니, 남친도 아닌데 그렇게 매일같이 와서 같이 밥먹자고 조르면 너도 불편할 것 아냐. 게다가 외국인이라며? 말은 통해?”

 

구체적인 질문을 해오는 그를 보며 인아는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말이 통하는 것 같진 않지만, 불편하진 않은데. 차라리 지금 서대현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더 불편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대현이 갑자기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 싶어 그를 힐끔 올려다 보았다.  

 

“나는 나 군대 간 사이에 너 남친 생긴건가 해서 바짝 쫄아 있었거든.”

 

“나한테 남친 생겼다고 선배가 왜 쫄아요?”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몰랐어? 네가 하도 철벽을 쳐서 그동안 말을 못해서 그렇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인아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아니, 내가 1학년 때 그렇게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저 그가 학회에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하고, 그가 고아원 봉사를 간다고 해서 따라가고 했던 게 다이긴 했다. 

 

고백을 안 해서 몰랐나? 그래도 티가 나긴 했을 텐데. 하긴, 아무도 자기가 서대현한테 관심이 있는지 몰랐다. 효진이조차.

 

그럼, 이 남자도 몰랐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관심있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인아를 보며 서대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뭐, 지금 당장 사귀자는 건 아니고. 넌 올해 졸업이잖아? 나는 아직도 2년이나 남았고. 그냥…… 너도 생각해 보라고. 괜히 급하게 사귀었다가 내가 취업도 못하고 빌빌거리면 어떡해. 그치?”

 

인아는 그가 관심있다고 한 말이 그저 빈소리가 아님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다.

 

1학년 때 과내 학회를 소개하러 들어온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구릿빛 피부에 짧게 친 머리, 게다가 듣기 좋은 저음은 단번에 인아의 관심을 끌었다. 

 

원래 학회는 3학년이 부장을 맡는데, 그 학회는 2학년인 서대현이 맡고 있다고 했다. 서대현 얼굴 보느라, 그 학회가 뭘 하는 학회인지도 모르고 다짜고짜 가입했다. 

 

학회는 정치, 사회 등의 이슈를 가지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sns에 올려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나름 철학이 있는 모임이었다. 알고 보니, 거의 안 굴러가는 모임을 그가 살려낸 거였다. 

 

인아는 토론 모임은 물론이요, 회식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했다. 효진이 그렇게 공부하면 장학금을 받겠다고 할 정도로.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서대현한테 관심이 있어서였다.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그를 보며 인아는 늘 남친이 생긴다면 저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가 고아원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청소, 빨래 등을 돕고 아이들을 돌본다는 걸 알고 나서는 더 반했다. 그래서 어느덧 그가 고아원을 방문할 때는 그녀도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예고도 없이 군대를 가버렸다. 자대배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학회 동기들이랑 한 번, 봉사 동아리 사람들이랑 한 번, 총 두 번의 면회를 갔다. 

 

그 두 번의 면회가 다였다. 계속 찾아가기엔 명분이 없었다. 




서대현과 잡담을 나누다가 열람실에 올라온 인아는 노트북을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관심은 있다라. 뭐라고 대답을 했어야 하나. 나도 관심있다고 했어야 하나? 

 

아니, 원래 관심있으면 바로 사귀자고 하지 않나? 생각이 많아서 여자도 함부로 사귀지 않나보다는 생각에 인아는 그가 더더욱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5시에 수업이 끝난다고 하던 라티아나는 6시가 거의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그냥 집에 가자니 신경이 쓰였다. 

 

그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저 오늘도 후문으로 나가려는 거다 스스로를 세뇌하며 인아는 체육관으로 올라가는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전처럼 야외공연장 스탠드에 앉아 있으려나 해서 주변도 잘 둘러보면서. 

 

이제는 꽤 더워진 날씨 때문에 언덕을 오르고 나니, 이만저만 덥지 않았다.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대신, 인아는 겉옷을 벗어 손에 들었다. 

 

그때, 체육과 학생인 듯 트레이닝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건물을 나오는 게 보였다. 

 

"걔는 우리과 왜 온 거야?"

 

"아, 새X, 존X 민폐야. 그렇게 지 마음대로 할 거면 지네 나라로 가든가."

 

"나 오늘 교수님 머리에서 레알로 김나는 거 봤잖어. 조만간 학사 경고 받을 것 같지 않냐?"

 

그들의 대화에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인아는 못 들은척 그들 옆을 지나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라도 누가 있나 해 주변을 둘러보며 인아는 수영장이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학생들을 보니 수업이 늦게 끝났나보다. 아니면 개념 없는 이 남자가 수업 시간표를 또 잘못 알았거나. 

 

아무도 없는 수영장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막연히 샤워실이나 탈의실 안에 있나 하고 안를 힐끔 들여다 보았으나,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긴, 샤워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면 그것 역시 문제다. 

 

그녀는 구석에 겉옷과 가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수영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바닥이 보이는 깨끗하고 넓은 수영장을 보며 인아는 불현듯 더운데 발이라고 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물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녀는 발이고 뭐고 자석에 이끌리듯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바닥에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있는 남자가 보였던 것이다. 누군지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피부색과 몸매부터가 남달랐으니까. 

 

깊을 거라고 생각했던 수영장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젖은 옷이 온몸에 들러붙어 수영에 서투른 몸을 더더욱 둔하게 만들었지만, 인아의 눈에는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창백한 남자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를 향해 헤엄쳐 가야 한다고 허부적거리는 인아의 코와 입에서 거품이 뽀그르르 새어 나왔다. 

 

아 씨…… 나, 수영 배웠는데……

 

그러나 마지막으로 수영을 해본 게 언젠지 기억나지 않았다. 보육원에 가기 전이니까…… 초등학생 때였나보다. 

 

인아가 눈을 꾹 감았다. 이래서 물에 빠진 사람 구하겠다고 함부로 뛰어드는 거 아니라고 하나 보다.

 

제발, 경비원이든 누구든 오라고 빌며 꼬르륵 물을 삼킬 때, 갑자기 물보라가 일어나며 그녀의 몸이 위로 붕 떠오르더니 물 밖으로 튕겨 나갔다. 

 

수영장 밖, 바닥으로 쫘악 밀려나간 인아는 온몸이 쓸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정신이 없어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콜록거리며 소독약 냄새가 밴 물을 뱉어낸 인아는 자기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 곳에는 만지면 쫀득거릴 것만 같은 잔 근육으로 뒤덮인 새하얀 상체를 가진 남자가 회색 눈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사람 눈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번쩍거릴 수 있을까 신기하여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괜찮아?"

 

담담하게 묻는 말에 인아가 물이 들어가 따가운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 그쪽이야말로 괜찮아요?"

 

"나 왜?"

 

라티아나가 그녀 옆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물었다. 물속에 가라앉아 있던 사람치고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인아는 갑자기 화가 버럭 났다. 

 

"왜긴 왜에요!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잖아! 난 그쪽 죽은 줄 알고……!"

 

흥분한 인아가 시뻘게진 눈으로 소리치자, 그가 좀전보다 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죽을까 봐 살리려고 물에 들어온 거였어? 너 그러다가 죽어. 수영도 못 하는 거 같던데."

 

"그러잖아도 후회하고 있어요."

 

콜록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인아가 바닥에 다시 주저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 올렸다. 

 

"뭐, 뭐해요!"

 

"못 걷잖아. 나는 잘 걸으니까 도와준다고. 옷 갈아입어야겠다. 다 젖었어."

 

"...... 옷도 없는데."

 

"내 트레이닝 복 입어."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인아는 얼른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다들 집에 갔는데, 이 남자는 대체 혼자 물속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사물함 앞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 인아를 앉힌 라티아나가 갑자기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인아가 기겁을 하며 발로 그를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사물함에 등까지 부딪친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우, 왜에!"

 

"지금 어딜 만져요!"

 

"옷 벗겨주잖아. 젖은 옷은 잘 안 벗겨져."

 

천연덕스러운 말에 인아는 두 팔을 엑스자로 만들어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   

 

"아니, 여자 옷을 어, 어떻게……!"

 

그러자 그는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너네는 왜 옷 같은 건 입고 살아서…… 불편하게."

 

"옷 안 입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인아가 어처구니가 없어 외쳤으나, 라티아나는 말없이 돌아서서 사물함을 열었다. 안에서 트레이닝 복을 꺼낸 그가 그녀에게 옷을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걸로 갈아입어. 음…… 샤워도 해도 돼. 지금 아무도 없어."

 

"됐어요. 옷만 갈아입을래."

 

인아가 옷을 받아들며 말했다. 단 둘 밖에 없다는데 샤워라니 말도 안 됐다. 

 

“그래. 나는 샤워하고 나올게.”

 

그가 수건을 들고 샤워실로 사라지는 걸 보고 인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 남자는 내가 여자가 아닌 거다. 그 동안 쫓아다닌 건 그저 한국에 사는 게 외로워서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닌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샤워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인아는 젖은 옷을 뜯어내듯 벗어버렸다. 

 

한편 샤워기 아래 서 있는 라티아나는 자기 몸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커질 수가 있나?

 

난생 처음 보는 몸의 반응에 그는 한참을 꼼짝도 안 하고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그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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